예수님은 대단하다. 예수님은 요즘 말로 하면 문창과를 나오고 신춘문예에 등단하고
수십 년 작품생활을 해온 작가 못지않은 문학적 천재성을 펼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위대한 시인”(A Great Poet)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갑자기 예수께서 왜 하찮은 들꽃과 새를 언급하시는가.
충격이다.
그리고는 다음 장면에서 그 꽃들을 솔로몬의 의상과 비교하신다.
두 번째 충격이다. 솔로몬의 옷은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선택된 왕의 옷이 아니던가. 설마 쉽게 짓밟혀
뭉그러질 들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신다.
중심은 들꽃도 아니고, 솔로몬의 의상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들을 지목하신 것이다.
세상에 버려지고 소외당하고 들풀처럼 흔들거리며 살아가는 자신들을 지칭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예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그의 사랑하시는 무리에게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고등교육도 받지 못하고, 관리들이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초청하기 위하여
예수는 그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자연을 들어 쓰신다.
무리들은 다시 놀란다. 과연 이렇게 지천에 깔린 하찮은 들꽃으로
인간의 존재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렇게 하늘의 진리를 선포한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왠지 가슴에 파고들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감동이 넘쳐나는 것은
그것이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사랑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언어는 처음부터 사랑이 충만한 말씀이었다.
게다가 시적 상상력까지 넘실거렸다.
무리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만족과 환희가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예수님이 사용한 시적 상상력은 곧 치유의 상상력이었던 것이다.